2. 세계 각 종교 탐방
6) 유교(儒敎)
공자를 시조(始祖)로 하는 중국의 대표적 사상. 공교(孔敎)·공자교(孔子敎)라고도 한다.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이념으로 삼고, 수신(修身)·제가(齊家)·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정치학이며, 수천 년 동안 중국·한국·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원시 유교】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는 대성(大聖)이었으나 고국인 노(魯)나라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년간 여러 나라로 돌아다니며 ‘선왕(先王)의 도(道)’를 역설하였으나 끝내 그 이상을 펴지 못하였다.
만년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사학(私學)을 열어 많은 제자를 가르치는 한편 《시(詩)》 《서(書)》의 2경을 정리하고 예(禮)·악(樂)을 선정하였으며 《춘추(春秋)》를 저술하고 또한 《역(易)》을 좋아하여 그 해석서라 할 수 있는 《십익(十翼)》을 저술하였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진수(眞髓)는 그가 죽은 후, 제자들이 수집 편찬한 그의 언행록인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육친(肉親)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 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그것은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훌륭한 정치를 행했던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관습적인 사회 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객관성을 보증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천을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倂唱)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善)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德治)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론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얼마 후 순자(荀子)가 나타나 맹자의 내면화에 반대이론을 내세웠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악(惡)이므로, 외면적·객관적인 예에 의해서만 수양이 완성된다고 생각하여 예를 강조하였다. 또 공자와 맹자가 존중하던 불가지(不可知)인 하늘의 존재를 추방하고 인간의 독자적 입장을 주장하였다.
【한대 유교】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자 유교는 분서갱유(焚書坑儒)의 대박해(大迫害)를 받아 한때 소멸하는 것도 같았으나 한(漢)나라 무제(武帝)에 이르러, 동중서(董仲舒)의 건의를 받아들임으로써 유교는 국가적 교학이 되어 그 지위를 굳혔다.
공자를 존숭하고, 정치계급은 오경(五經:역경·서경·시경·예기·춘추)을 읽도록 요청하여 유교는 왕조의 체제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전한(前漢) 때는 어떤 1경(經)에만 치중하는 학풍이 일더니 후한시대에는 여러 경서를 종합 검토하고 그것을 주석(註釋)하는 훈고학(訓學)이 성행하여 이것이 당대(唐代)로 계승되었다.
【신유교】 신유교(新儒敎)란 도학(道學)·주자학(朱子學)·양명학(陽明學) 등을 이르는 말이다. 후한 말기에 전래한 불교와, 노장사상(老莊思想)에 바탕을 둔 도학은 육조시대에 융성하여 서로 항쟁하는 가운데, 유교는 침체상태를 보였으나 당나라 때 도학의 선구자인 한유(韓愈)가 유교의 도통을 밝히고 숭유척불(崇儒斥佛)의 기치를 들었다.
이어 북송(北宋)에 이르러 주돈이(周敦)·정호(程顥)·정이(程) 등이 나와 과거 훈고에만 치중하던 유교를 형이상학적인 면에서 다루어 크게 부흥시켰고 이어 남송의 주자(朱子)는 이들 학설을 집대성하여 주자학을 확립시켰다.
그는 5경(經)에 대신하여 4서(四書:대학·논어·맹자·중용)를 존중하고 이에 대한 《사서집주(四書集註)》를 저술하여 명성을 남겼으며 그 밖에도 《역본의(易本義)》 《시집전(詩集傳)》 등 많은 저술활동을 하였다. 주자는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 입각하여 이(理)와 기(氣)를 구분하고, 이를 만물의 근본이 되는 형이상의 도(道)라 하였으며, 기를 만물의 도구(道具)가 되는 형이하의 기(器)라 하였다. 그러나 주자와 거의 같은 시대의 육상산(陸象山)은 견해를 달리하여 ‘심즉리(心卽理)’의 일원론(一元論)을 주장하였다.
그의 육학(陸學)은 심학(心學)이라고도 하였으며 이것은 명나라의 왕양명(王陽明)에게로 계승되어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양명학이 정립되었다.
【유교의 몰락】 청대(淸代)에 이르자 유교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표방하는 고증학(考證學)이 대두하여 공허한 이론에만 치중하는 송학(宋學:주자학·양명학)을 물리치고 고정(考訂)·교감(校勘)·훈고를 통하여 고전(古典)의 참뜻을 이해하려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을 계기로 중국의 유교는 종말기를 맞이하였다.
열강의 침략, 청조(淸朝)의 부패에 궐기한 중국인은 많은 개혁안을 제출하였으며 그 중에서 공양학파(公羊學派)인 캉유웨이[康有爲] 등은 유교의 변법자강책(變法自强策)을 주장하여 근대국가로의 탈피를 꾀하였으나 수구파(守舊派)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그 후 유교는 밀려드는 근대과학에 자리를 양보하였다.
특히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전개된 근대화운동은 봉건체제의 모든 것을 부정하여, 유교도 그 정신적 지주였다는 뜻에서 적대시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운동의 열기가 식고 평정을 되찾으면서 전통문화가 재검토되었고, 그 결과 유교도 앞으로의 문화창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소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나 중국이 공산화된 이후 유교는 탄압되고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의 유교】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 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正)·우탁(禹倬)·권부(權溥) 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이숭인(李崇仁)·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조식(曺植)·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유성룡(柳成龍)·김성일(金誠一)·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이귀(李貴)·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이진상(李震相) 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물(物)·성(性)에 대한 이론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이익(李瀷)·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최익현(崔益鉉)·조병세(趙秉世)·민영환(閔泳煥)·이준(李儁)·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 상기의 내용은 두산세계대백과 사전을 참고하여 정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