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대법문
= 병오년(丙午/2026) 신년 법어 =
병오년의 광명한 태양이 떠오르는 나날의 아침, 우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 부처님 깨달음의 불변 진리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도 간단없이 제행무상의 광명이 처처에 천당극락의 상서로운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가정하여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달아 지구에 제시한 그 깨달음에 견줄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위대한 사건은 전불문후불문의 절대 사건입니다.
그 공덕 또한 그 어떤 신통방통과 계를 달리하는 측량 불가의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철학 혹은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이것 앞에서는 조족지혈일 뿐입니다.
세간의 학자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를 '불교의 힌두화'라는 현상적 형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는 문헌과 역사를 통한 학자로서의 의로운 연구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문헌 사학적 혹은 교학적 역할일 수 있습니다.
현재 원음불교라는 이름으로 남방불교 경전 연구와 팔리어 해석의 풍토 그리고 그것 속에서의 수행법들이 정통이지 않느냐 하는 기세를 형성하고 또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를 더욱 다양한 관점으로 비추어 교류 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문자가 아닌 깨달음의 노래가 주제이고 정통이며 그것이 전부의 상황이라는 것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설령 불교가 문자나 형식보다 깨달음이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갈지자를 그린다 해도 이는 조금도 가벼이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문제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주제와 전통이 불교의 생명이자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재세시 인도의 토양은 불변하는 자아(Atman)가 있다는 진리를 뿌리로 하여 서 있는 힌두문명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붓다의 사자후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였습니다.
이는 당시 인도 문화풍토의 근기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힌두 문화의 흐름과 붓다의 위대한 깨달음 사이에는 거대한 근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파니샤드나 베다 등등을 비롯한 경전과 인도의 문화와 전통들이 화려하고 수승해 보일지라도 제행무상진리와 제법무아의 진리 등등의 실상과의 근기적 차이는 지대합니다.
고로 인도 힌두 문화 토양은 부처님 진리의 씨앗을 싹 틔우고 법(法)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도 토양에서 불교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깨달음을 증득하신 부처님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직접 인도 힌두 토양의 문화적 근기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리더쉽이 가능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 이를 대신할 이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교단의 유지 발전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불교는 쇠퇴 일로를 걷는 등 고전을 하기에 이릅니다.
급기야 인도의 힌두 문화 풍토와 다른 새로운 땅 티베트의 고원과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곳에 수승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름 수용할 문화적 토양과 근기가 어렵사리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승불교가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힌두화된 불교가 아닙니다.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유아적인 관점이 습합된 듯한 오해를 받기 십상이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아적 토대 위의 실상관입니다.
이는 힌두 문화까지 부처님의 진리를 심화하여 출가 위주의 불교에서 재가와 병립하여 수행정진이 가능한 부처님 깨달음 진리 교단으로서의 꽃을 피워내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기사이적의 역사를 쓴 것이 대승불교 수행자와 대중의 역사인 것은 자명합니다.
2026년 새해에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변화를 인식한 육뇌식의 가스라이팅 즉 오온사기를 당해 일희일비하는 대신 부처님의 깨달음 진리에 늘 깨어 있는 붓다의 삶이시길 발원합니다.
오온의 육뇌식이 인지하는 나를 나의 전부로 착각하는 육뇌식 사기 즉 오온사기의 우를 넘어 본승불교의 초성진리 바다에 이를 때 비로소 부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셨던 깨달음의 진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의 진리를 밝힌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본승진리는
현대문명과 미래 문명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체 부작용을 치유하고 자아실현이 가능한 영겁의 진리입니다.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진리라야 현대문명의 이기가 주는 유익함에 따른 육뇌식의 사기로 인한 크고 작은 정신병리 작용의 고해와 그 윤회고의 현상적 난해사 등등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전하신 깨달음의 진리는 일체가 부처님이라는 진리이며 고로 이를 자각케 되면 부처행을 하게 된다는 설파이십니다.
우리는 일체는 상시수수 초성의 절대무결 지복의 시방주로서의 부처님이십니다.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일불관세음보살님은 부처님 깨달음의 실상이 현현된 모습 즉 일체구족 즉 팔만사천법 구족의 십일면천수천안 일불관세음보살님 모습 즉 누구나의 참모습입니다.
당연 공덕 또한 천지우주 시방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힌두화된 불교 역사가 아니라 부처님 원음의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밝힌 사건입니다.
그것도 전불문후불문 완결로 드러난 사건이며 부처님 팔만사천법 구족과 그 지복 실상의 모습입니다.
지복이 곧 모든 것의 시작이고 완결입니다.
다만 자증일주 여정상 각자가 처한 사정과 자각의 여정이 다를 뿐입니다.
올 한 해 그 어떤 미지수의 난해한 시련과 변화가 들이닥쳐 고해케 할지라도
이는 고상우아 난이법락 성사입니다
일체개고의 진리 역시 진실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만사의 외형을 인지하는 오온육식의 육뇌식이 인지하는 표층의식입니다. 이의 의식에 가스라이팅 즉 오온사기에 중독되었을 때 일어나는 인식의 세계입니다.
불독관법에 깨어 관하면 이는 곧 시방주 지복발현 고상우아 난이법락 자증일주를 위해 스스로 나툰 자비사랑이자 그 자작극입니다.
이는 본승불교의 수행자에게 있어 당연 온전한 감은귀감의 성사(聖事)입니다.
존재론적 최승 진리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초성입니다.
행위론적 최승 진리는 부처님의 자비 사랑입니다.
팔리어 남방불교 경전을 포함한 팔만사천 경전이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진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절대무결 초성의 지복 고상우아 완결버전의 최승의 자신 즉
일불관세음보살도 한 걸음 한 걸음입니다.
병오년 한 해, 시방주 지복발현 고상우아 난이법락 자증일주 불독관법 여여키를 발원해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의 발걸음 닿는 곳마다 본승 법화불교의 십일면천수천안 일불관세음보살도 법화 한 송이 송이 꽃이 처처에 피어나고 그 향기 가득하시기를 은축합니다.
지복발현을 은축합니다.
2025. 12월 30일 무언각(無言閣)에서
太安 電覺 合掌
등대법문
= 병오년(丙午/2026) 신년 법어 =
병오년의 광명한 태양이 떠오르는 나날의 아침, 우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 부처님 깨달음의 불변 진리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도 간단없이 제행무상의 광명이 처처에 천당극락의 상서로운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가정하여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달아 지구에 제시한 그 깨달음에 견줄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위대한 사건은 전불문후불문의 절대 사건입니다.
그 공덕 또한 그 어떤 신통방통과 계를 달리하는 측량 불가의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철학 혹은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이것 앞에서는 조족지혈일 뿐입니다.
세간의 학자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를 '불교의 힌두화'라는 현상적 형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는 문헌과 역사를 통한 학자로서의 의로운 연구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문헌 사학적 혹은 교학적 역할일 수 있습니다.
현재 원음불교라는 이름으로 남방불교 경전 연구와 팔리어 해석의 풍토 그리고 그것 속에서의 수행법들이 정통이지 않느냐 하는 기세를 형성하고 또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를 더욱 다양한 관점으로 비추어 교류 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문자가 아닌 깨달음의 노래가 주제이고 정통이며 그것이 전부의 상황이라는 것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설령 불교가 문자나 형식보다 깨달음이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갈지자를 그린다 해도 이는 조금도 가벼이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문제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주제와 전통이 불교의 생명이자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재세시 인도의 토양은 불변하는 자아(Atman)가 있다는 진리를 뿌리로 하여 서 있는 힌두문명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붓다의 사자후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였습니다.
이는 당시 인도 문화풍토의 근기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힌두 문화의 흐름과 붓다의 위대한 깨달음 사이에는 거대한 근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파니샤드나 베다 등등을 비롯한 경전과 인도의 문화와 전통들이 화려하고 수승해 보일지라도 제행무상진리와 제법무아의 진리 등등의 실상과의 근기적 차이는 지대합니다.
고로 인도 힌두 문화 토양은 부처님 진리의 씨앗을 싹 틔우고 법(法)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도 토양에서 불교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깨달음을 증득하신 부처님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직접 인도 힌두 토양의 문화적 근기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리더쉽이 가능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 이를 대신할 이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교단의 유지 발전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불교는 쇠퇴 일로를 걷는 등 고전을 하기에 이릅니다.
급기야 인도의 힌두 문화 풍토와 다른 새로운 땅 티베트의 고원과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곳에 수승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름 수용할 문화적 토양과 근기가 어렵사리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승불교가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힌두화된 불교가 아닙니다.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유아적인 관점이 습합된 듯한 오해를 받기 십상이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아적 토대 위의 실상관입니다.
이는 힌두 문화까지 부처님의 진리를 심화하여 출가 위주의 불교에서 재가와 병립하여 수행정진이 가능한 부처님 깨달음 진리 교단으로서의 꽃을 피워내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기사이적의 역사를 쓴 것이 대승불교 수행자와 대중의 역사인 것은 자명합니다.
2026년 새해에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변화를 인식한 육뇌식의 가스라이팅 즉 오온사기를 당해 일희일비하는 대신 부처님의 깨달음 진리에 늘 깨어 있는 붓다의 삶이시길 발원합니다.
오온의 육뇌식이 인지하는 나를 나의 전부로 착각하는 육뇌식 사기 즉 오온사기의 우를 넘어 본승불교의 초성진리 바다에 이를 때 비로소 부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셨던 깨달음의 진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의 진리를 밝힌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본승진리는
현대문명과 미래 문명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체 부작용을 치유하고 자아실현이 가능한 영겁의 진리입니다.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진리라야 현대문명의 이기가 주는 유익함에 따른 육뇌식의 사기로 인한 크고 작은 정신병리 작용의 고해와 그 윤회고의 현상적 난해사 등등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전하신 깨달음의 진리는 일체가 부처님이라는 진리이며 고로 이를 자각케 되면 부처행을 하게 된다는 설파이십니다.
우리는 일체는 상시수수 초성의 절대무결 지복의 시방주로서의 부처님이십니다.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일불관세음보살님은 부처님 깨달음의 실상이 현현된 모습 즉 일체구족 즉 팔만사천법 구족의 십일면천수천안 일불관세음보살님 모습 즉 누구나의 참모습입니다.
당연 공덕 또한 천지우주 시방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힌두화된 불교 역사가 아니라 부처님 원음의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밝힌 사건입니다.
그것도 전불문후불문 완결로 드러난 사건이며 부처님 팔만사천법 구족과 그 지복 실상의 모습입니다.
지복이 곧 모든 것의 시작이고 완결입니다.
다만 자증일주 여정상 각자가 처한 사정과 자각의 여정이 다를 뿐입니다.
올 한 해 그 어떤 미지수의 난해한 시련과 변화가 들이닥쳐 고해케 할지라도
이는 고상우아 난이법락 성사입니다
일체개고의 진리 역시 진실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만사의 외형을 인지하는 오온육식의 육뇌식이 인지하는 표층의식입니다. 이의 의식에 가스라이팅 즉 오온사기에 중독되었을 때 일어나는 인식의 세계입니다.
불독관법에 깨어 관하면 이는 곧 시방주 지복발현 고상우아 난이법락 자증일주를 위해 스스로 나툰 자비사랑이자 그 자작극입니다.
이는 본승불교의 수행자에게 있어 당연 온전한 감은귀감의 성사(聖事)입니다.
존재론적 최승 진리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초성입니다.
행위론적 최승 진리는 부처님의 자비 사랑입니다.
팔리어 남방불교 경전을 포함한 팔만사천 경전이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진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절대무결 초성의 지복 고상우아 완결버전의 최승의 자신 즉
일불관세음보살도 한 걸음 한 걸음입니다.
병오년 한 해, 시방주 지복발현 고상우아 난이법락 자증일주 불독관법 여여키를 발원해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의 발걸음 닿는 곳마다 본승 법화불교의 십일면천수천안 일불관세음보살도 법화 한 송이 송이 꽃이 처처에 피어나고 그 향기 가득하시기를 은축합니다.
지복발현을 은축합니다.
2025. 12월 30일 무언각(無言閣)에서
太安 電覺 合掌
등대법문
= 병오년(丙午/2026) 신년 법어 =
병오년의 광명한 태양이 떠오르는 나날의 아침, 우리는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 부처님 깨달음의 불변 진리 앞에 서 있습니다.
지금도 간단없이 제행무상의 광명이 처처에 천당극락의 상서로운 꽃을 피워내고 있습니다.
가정하여 석가모니 부처님보다 더 위대한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제행무상의 진리를 깨달아 지구에 제시한 그 깨달음에 견줄만한 것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 위대한 사건은 전불문후불문의 절대 사건입니다.
그 공덕 또한 그 어떤 신통방통과 계를 달리하는 측량 불가의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철학 혹은 깨달음이 있다고 해도 이것 앞에서는 조족지혈일 뿐입니다.
세간의 학자들은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진 이유를 '불교의 힌두화'라는 현상적 형상에서 찾고 있습니다. 이는 문헌과 역사를 통한 학자로서의 의로운 연구이고 존중받아 마땅한 문헌 사학적 혹은 교학적 역할일 수 있습니다.
현재 원음불교라는 이름으로 남방불교 경전 연구와 팔리어 해석의 풍토 그리고 그것 속에서의 수행법들이 정통이지 않느냐 하는 기세를 형성하고 또 유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불교를 더욱 다양한 관점으로 비추어 교류 진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는 문자가 아닌 깨달음의 노래가 주제이고 정통이며 그것이 전부의 상황이라는 것에 주의하여야 합니다.
설령 불교가 문자나 형식보다 깨달음이 전통이라는 미명하에 갈지자를 그린다 해도 이는 조금도 가벼이 해서는 안 되는 절대적 문제인 것입니다. 깨달음이라는 주제와 전통이 불교의 생명이자 심장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재세시 인도의 토양은 불변하는 자아(Atman)가 있다는 진리를 뿌리로 하여 서 있는 힌두문명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석가모니 붓다의 사자후는 '나라고 할 것이 없다'라는 제법무아(諸法無我)와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라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진리였습니다.
이는 당시 인도 문화풍토의 근기가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상황이었습니다.
뿌리 깊은 힌두 문화의 흐름과 붓다의 위대한 깨달음 사이에는 거대한 근기의 차이가 있습니다. 어찌 보면 우파니샤드나 베다 등등을 비롯한 경전과 인도의 문화와 전통들이 화려하고 수승해 보일지라도 제행무상진리와 제법무아의 진리 등등의 실상과의 근기적 차이는 지대합니다.
고로 인도 힌두 문화 토양은 부처님 진리의 씨앗을 싹 틔우고 법(法)의 수레바퀴를 굴릴 수 있기에는 부족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인도 토양에서 불교가 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직접 깨달음을 증득하신 부처님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그것은 부처님께서 직접 인도 힌두 토양의 문화적 근기 차이를 극복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리더쉽이 가능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부처님 입멸 후 이를 대신할 이가 없으므로 말미암아 교단의 유지 발전은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후 불교는 쇠퇴 일로를 걷는 등 고전을 하기에 이릅니다.
급기야 인도의 힌두 문화 풍토와 다른 새로운 땅 티베트의 고원과 중국과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대륙으로 향하게 됩니다.
이곳에 수승한 부처님의 깨달음을 나름 수용할 문화적 토양과 근기가 어렵사리 있었기에 오늘날의 대승불교가 있기에 이른 것입니다.
대승불교는 힌두화된 불교가 아닙니다. 대승불교는 힌두교의 유아적인 관점이 습합된 듯한 오해를 받기 십상이지만 그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무아적 토대 위의 실상관입니다.
이는 힌두 문화까지 부처님의 진리를 심화하여 출가 위주의 불교에서 재가와 병립하여 수행정진이 가능한 부처님 깨달음 진리 교단으로서의 꽃을 피워내기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기사이적의 역사를 쓴 것이 대승불교 수행자와 대중의 역사인 것은 자명합니다.
2026년 새해에는 겉으로 드러난 현상의 변화를 인식한 육뇌식의 가스라이팅 즉 오온사기를 당해 일희일비하는 대신 부처님의 깨달음 진리에 늘 깨어 있는 붓다의 삶이시길 발원합니다.
오온의 육뇌식이 인지하는 나를 나의 전부로 착각하는 육뇌식 사기 즉 오온사기의 우를 넘어 본승불교의 초성진리 바다에 이를 때 비로소 부처님께서 전하시고자 하셨던 깨달음의 진실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의 진리를 밝힌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본승진리는
현대문명과 미래 문명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체 부작용을 치유하고 자아실현이 가능한 영겁의 진리입니다.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진리라야 현대문명의 이기가 주는 유익함에 따른 육뇌식의 사기로 인한 크고 작은 정신병리 작용의 고해와 그 윤회고의 현상적 난해사 등등의 문제를 풀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전하신 깨달음의 진리는 일체가 부처님이라는 진리이며 고로 이를 자각케 되면 부처행을 하게 된다는 설파이십니다.
우리는 일체는 상시수수 초성의 절대무결 지복의 시방주로서의 부처님이십니다.
법화보살설경(법화경)의 일불관세음보살님은 부처님 깨달음의 실상이 현현된 모습 즉 일체구족 즉 팔만사천법 구족의 십일면천수천안 일불관세음보살님 모습 즉 누구나의 참모습입니다.
당연 공덕 또한 천지우주 시방 그 자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힌두화된 불교 역사가 아니라 부처님 원음의 깨달음을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밝힌 사건입니다.
그것도 전불문후불문 완결로 드러난 사건이며 부처님 팔만사천법 구족과 그 지복 실상의 모습입니다.
지복이 곧 모든 것의 시작이고 완결입니다.
다만 자증일주 여정상 각자가 처한 사정과 자각의 여정이 다를 뿐입니다.
올 한 해 그 어떤 미지수의 난해한 시련과 변화가 들이닥쳐 고해케 할지라도
이는 고상우아 난이법락 성사입니다
일체개고의 진리 역시 진실한 진리입니다.
이것은 만사의 외형을 인지하는 오온육식의 육뇌식이 인지하는 표층의식입니다. 이의 의식에 가스라이팅 즉 오온사기에 중독되었을 때 일어나는 인식의 세계입니다.
불독관법에 깨어 관하면 이는 곧 시방주 지복발현 고상우아 난이법락 자증일주를 위해 스스로 나툰 자비사랑이자 그 자작극입니다.
이는 본승불교의 수행자에게 있어 당연 온전한 감은귀감의 성사(聖事)입니다.
존재론적 최승 진리는 제행무상과 제법무아의 초성입니다.
행위론적 최승 진리는 부처님의 자비 사랑입니다.
팔리어 남방불교 경전을 포함한 팔만사천 경전이 전하고자 하는 깨달음의 진수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것은 곧바로 절대무결 초성의 지복 고상우아 완결버전의 최승의 자신 즉
일불관세음보살도 한 걸음 한 걸음입니다.
병오년 한 해, 시방주 지복발현 고상우아 난이법락 자증일주 불독관법 여여키를 발원해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의 발걸음 닿는 곳마다 본승 법화불교의 십일면천수천안 일불관세음보살도 법화 한 송이 송이 꽃이 처처에 피어나고 그 향기 가득하시기를 은축합니다.
지복발현을 은축합니다.
2025. 12월 30일 무언각(無言閣)에서
太安 電覺 合掌
